# 베트남전 참전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참전 이유)
나이가 스물여섯이 즈음 되어서야 병역의 의무에 대한 부분을 생각하게 됐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입대를 하는데, 왜 그때는 그러지 못했는지. 어린 시절 집을 떠나온 터라 계속해 날아들었을 입영통지서를 확인하지 못했고, 입대하려 자원했을 때는 이미 수배 중이었다. 신체검사를 받고는 2주 만에 입대했다.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초등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가 여기서 시간을 보내느니 베트남전에 참전하자는 권유로 떠나게 됐다.
# 베트남전 참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벌레 특히 모기가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물어대니 생활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제가 주로 했던 일은 보초를 서는 것이었기에 그 어려움을 말할 것이 없었다. 그 때 노란 가루가 큰 통에 담겨있었는데, 그걸 몸에 뒤집어쓰고 나면 모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때는 그게 고엽제인지, 나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누구도 몰랐고, 당장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이들 사용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우리나라에서 위문공연을 왔다. 당시 유명한 연예인들이 많이 왔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폭탄이 날아왔다. 쇠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전 인원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살기 위한 발악이었고, 그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을 때는 어떤 상황이셨나요?
참전 후 돌아왔을 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나라는 당시 원조를 받는 나라였고, 현재 우리나라보다 GDP가 낮은 나라들이 우리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셨다 들었는데,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셨는지요?
저는 가려움증이 가장 괴로웠다. 가려우면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댔다. 상처가 짓물러도 긁지 않으면 못살 것 같았다. 그게 고엽제 후유증인지는 생각지 못했고, 그 가려움 때문에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
전립선암에 걸렸었다. 그 즈음 고엽제 후유증으로 전립선암이 걸릴 수 있다 이야기를 들었고, 뒤늦게 내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뒤늦게 보훈청에서 보훈대상으로 선정돼 국가유공자가 됐다. 그리도 힘들었을 때 보훈대상으로 선정됐으면 삶이 좀 나았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 돌아와 감사하다’는 생각뿐이다.
# 현재 그림으로 이름을 알리셨는데, 베트남전 참전이 미친 영향이 있으시다면?
고엽제로 인한 가려움이 잊히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붓을 잡은 순간이었다. 글을 쓰고, 난을 치고, 그림을 그리면 잠시나마 그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붓을 내려놓지 않았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그림만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1989년 신미술대전 국회문공위원장상, 문인화 부문 대상, 199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우수상으로 돌아왔다.
지난 해 프랑스 파리 ‘갤러리 89’에서 첫 해외전시를 열었다. 서예 붓으로 서양화 물감을 다루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데, 프랑스에서 반응이 좋았다. 이런 질감은 처음 본다며 극찬을 해주셨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봐야 잔소리 밖에 더 되겠냐마는,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삶보다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비교하기보다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