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5-07-19 08:03

  • 흐림속초22.2℃
  • 천둥번개21.6℃
  • 흐림철원20.7℃
  • 흐림동두천21.3℃
  • 흐림파주21.1℃
  • 흐림대관령18.3℃
  • 흐림춘천21.7℃
  • 비백령도21.8℃
  • 비북강릉22.8℃
  • 흐림강릉23.6℃
  • 흐림동해23.3℃
  • 비서울22.1℃
  • 비인천22.0℃
  • 흐림원주21.7℃
  • 안개울릉도23.5℃
  • 비수원22.5℃
  • 흐림영월22.3℃
  • 흐림충주23.0℃
  • 흐림서산23.7℃
  • 흐림울진22.1℃
  • 천둥번개청주24.2℃
  • 천둥번개대전23.1℃
  • 흐림추풍령21.7℃
  • 비안동22.8℃
  • 흐림상주22.3℃
  • 비포항23.2℃
  • 흐림군산23.5℃
  • 비대구22.0℃
  • 비전주23.4℃
  • 천둥번개울산22.8℃
  • 비창원24.6℃
  • 비광주24.2℃
  • 비부산24.4℃
  • 흐림통영25.3℃
  • 비목포25.7℃
  • 흐림여수26.4℃
  • 흐림흑산도24.8℃
  • 흐림완도25.8℃
  • 흐림고창24.7℃
  • 흐림순천23.7℃
  • 천둥번개홍성(예)23.8℃
  • 흐림23.2℃
  • 흐림제주26.3℃
  • 구름많음고산25.8℃
  • 흐림성산25.8℃
  • 흐림서귀포27.2℃
  • 흐림진주24.7℃
  • 구름조금강화21.2℃
  • 흐림양평21.5℃
  • 흐림이천22.0℃
  • 흐림인제21.0℃
  • 흐림홍천20.7℃
  • 흐림태백21.0℃
  • 흐림정선군21.9℃
  • 흐림제천21.9℃
  • 흐림보은23.4℃
  • 흐림천안23.6℃
  • 흐림보령24.7℃
  • 흐림부여23.1℃
  • 흐림금산22.9℃
  • 흐림22.9℃
  • 흐림부안23.4℃
  • 흐림임실22.8℃
  • 흐림정읍24.4℃
  • 흐림남원23.6℃
  • 흐림장수22.4℃
  • 흐림고창군24.6℃
  • 흐림영광군25.2℃
  • 흐림김해시24.5℃
  • 흐림순창군23.0℃
  • 흐림북창원25.0℃
  • 흐림양산시24.1℃
  • 흐림보성군25.4℃
  • 흐림강진군25.5℃
  • 흐림장흥25.3℃
  • 구름많음해남26.3℃
  • 흐림고흥26.4℃
  • 흐림의령군23.5℃
  • 흐림함양군22.5℃
  • 흐림광양시25.3℃
  • 구름많음진도군25.7℃
  • 흐림봉화22.0℃
  • 흐림영주22.1℃
  • 흐림문경22.1℃
  • 흐림청송군22.1℃
  • 흐림영덕23.0℃
  • 흐림의성22.6℃
  • 흐림구미22.9℃
  • 흐림영천22.3℃
  • 흐림경주시24.0℃
  • 흐림거창22.9℃
  • 흐림합천23.3℃
  • 흐림밀양22.6℃
  • 흐림산청23.7℃
  • 흐림거제25.0℃
  • 흐림남해25.5℃
  • 흐림24.8℃
기상청 제공
시사캐치 로고
이지수 옹기장 “도고 옹기 후계자 찾고 싶어”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

이지수 옹기장 “도고 옹기 후계자 찾고 싶어”

충남 무형문화재 이지수 장인 “과거 아산은 옹기의 고장, 이유는...”


[크기변환]사본 -662166054_vYsKDWE1_0d1e86187fcfcd96b590786c17598b590cf9d939.jpg

 

[시사캐치]항아리 용기가 대세던 1960년대. 아산은 옹기의 고장이었다. 온양 시내 모종동은 흙이 좋기로 유명했고, 염치·도고·선장 등 아산 곳곳 옹기가마들은 모두 성업을 이뤘다. 그중에서도 도고면 금산리는 한때 300명도 넘는 옹기공이 모여 살던 장항선 최고 옹기마을로 불렸다. 삽교천이 방조제로 막히기 전에는 인주와 선장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배에 실려 온 새우젓과 소금이 금산마을 옹기에 담겨 전국으로 팔려나가면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도고에만 옹기가마가 5기에 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용기가 등장하고, 김치냉장고까지 대중화되면서 옹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좋은 흙을 고르는 것부터 잿물을 만들고 1200불가마에 구워내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중노동이지만 옹기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됐다. 그 많던 옹기장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지수 옹기장(충청남도 무형문화재 38-2)은 여전히 옹기가마를 지키고 있다. 옹기장이셨던 할아버지(이관여)와 아버지(이원범)에게 16살 때부터 흙 만지는 법을 배웠다고 하니 벌써 60년도 넘었다. 힘에 부칠 때도 많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숨 쉬는 그릇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천년의 지혜가 담긴전통 옹기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장인은 오늘도 손에서 흙을 놓지 못한다.

 

"선장, 도고 이쪽 지역은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왔어요. 그 물을 퍼다 옹기에 담아두면 일주일이면 저절로 정화되고 짠기가 사라졌죠. 수도도 정수시설도 없던 시절에 옹기 덕에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고추장, 된장, 김치 같은 우리의 좋은 발효 음식도 옹기가 없었다면 발달할 수 있었겠어요? 이렇게 좋은 그릇인데, 이젠 만드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얼마 없어요. 플라스틱이 가볍고 편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옹기의 맥이 끊기게 둘 수야 없지요.”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가 옹기였을 만큼 한국 천주교와 옹기는 역사가 깊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에 몰래 교우촌을 이루고 옹기업에 종사했는데, 옹기장수로 위장해 동료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며 안위를 살피기도 했다고. 이지수 장인 집안이 대대로 옹기업에 종사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옹기는 장인이자 종교인으로서 받아들인 숭고한 가업이기도 한 셈이다.

 

충청남도는 이지수 장인 가문의 역사와 노력, 공헌 등을 인정해 그의 집안을 2000년 충청남도 전통문화가정(8)으로, 이지수 장인을 2008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하지만 3대째 이어지던 가업의 명맥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수자 교육까지 마친 아들이 가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옹기 수요 자체도 줄어 수입이 많지 않은 데다, 무형문화재에 지정돼 자타공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인반열에 올라도 전승지원금은 불과 월 120만 원. 200만 원 벌기도 녹록지 않은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결혼해 가정까지 꾸린 아들에게 이 힘든 길을 따라오라 말하기도 어렵다.

 

이지수 장인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서 기초교육 과정,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하며 도고 옹기의 명맥을 이어줄 후계자를 찾고 있다. 옹기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은 제법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걷겠다고 나선 이는 아직 없어 고민이다.

 

"가르치다 보면 손재주 있는 사람, 가르치면 뭔가 될 것 같은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그만둬버려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알려주고 싶은 비법이 많은데 알려줄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옹기의 효과를 알아보고 찾아주는 이들 덕분에 기운을 얻는다. 주말이면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는 전국의 다양한 옹기를 관람하고 옹기 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전통 옹기를 구입할 수도 있는데, 기념품 삼아 사간 이들에게 "써보니 너무 좋아 더 사러 왔다는 인사를 들으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고. 그때마다 그는 없던 힘도 다시 끌어모은다.

 

"내 나이가 이제 여든둘입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저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지금 하는 일 해줄 사람, 진득하게 오래갈 사람 하나 잘 가르쳐두고 가는 거. 그거 말곤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에요.”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